본문 바로가기
침묵의 질병

희귀질환 환자의 금융권 진입장벽: 보험과 대출 이야기

by zidan05 2025. 5. 11.

희귀질환과 금융의 만남: ‘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사람들

 

희귀질환 환자에게 있어서 진단 그 자체는 삶의 커다란 분기점이 됩니다. 병의 진행, 치료, 생계, 사회참여 등 모든 영역에서 도전이 따르는데, 여기에 금융 영역에서의 ‘진입장벽’도 무겁게 작용합니다. 많은 환자들은 보험사나 은행 등 금융기관으로부터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불이익을 겪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예는 생명보험 가입 거절, 보험료 인상, 의료 고지 의무 강화, 대출 심사 탈락 등입니다.

희귀질환은 질환명부터 생소하고, 치료법이 불확실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금융기관은 위험을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워합니다. 이는 결국 ‘모르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논리로 작동하며, 보험 인수 거절, 추가 심사, 보장 제외 특약 등으로 이어집니다. 이 같은 기계적 분류는 환자의 사회적 복귀나 경제적 자립을 어렵게 하고, 나아가 가족 전체의 금융활동까지 제약하게 됩니다.
가령 부모 중 한 명이 환자이거나, 자녀가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 배우자나 보호자의 보험·대출 자격에도 불이익이 돌아가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희귀질환 환자는 금융 생태계 내에서 ‘리스크 덩어리’로 인식되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제도에서 배제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제가 과연 합리적이며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험의 ‘가입 거절’이라는 무형의 차별

보험은 개인의 건강 리스크를 분산시키고,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보완하는 사회적 안전망입니다. 하지만 희귀질환 환자에게 보험은 안전망이 아니라 ‘장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흔한 사례는 생명보험이나 실손보험 가입 시 ‘인수 거절’입니다. 국내 보험사들은 가입 신청자의 병력, 치료 이력, 약물 복용 기록 등을 상세히 조사하며, 희귀질환 명시 시 고지 항목에서 자동 탈락 처리하거나 특별할증, 담보 제외 조건을 적용합니다.

특히 치료가 어렵거나 완치 가능성이 낮은 질환의 경우 보험사는 보장 자체를 거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헌팅턴병, SMA, 파브리병 등은 국내 일부 보험사에서 ‘보장불가 질환 리스트’에 올라 있으며, 가입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극단적으로 높은 보험료가 책정됩니다. 이는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싶은 환자의 최소한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며, 오히려 이들을 더 큰 의료비 위험으로 내모는 아이러니를 낳습니다.

유럽 일부 국가는 유전정보에 기반한 보험 차별을 막기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했지만, 한국은 관련 규제가 미흡합니다. 유전자 검사 결과를 보험 인수 시 요구하거나 활용하는 것이 사실상 허용되는 구조이며, 환자들은 질병을 알리자니 거절당하고 숨기자니 법적 책임이 따르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질병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사회적 권리에서 배제되는’ 모순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대출과 금융 신용 평가에서의 불이익

보험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는 금융 대출에서의 차별입니다. 대부분의 은행과 금융기관은 대출 심사 시 직업, 소득, 자산, 채무 이력뿐 아니라 건강상태도 평가 요소로 간주합니다. 이 과정에서 희귀질환 환자는 ‘경제활동 지속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되어 신용등급이 불리하게 책정되거나, 대출 자체가 거절되기도 합니다. 특히 자영업자,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와 같은 불안정 고용 상태에 있는 환자는 이중 삼중의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일부 금융기관은 보험 가입 여부, 건강보험 청구 이력 등 간접 정보를 활용해 질병 유무를 추정하기도 하며, 이는 사실상 사적 영역 침해이자 ‘비공식적 차별’로 작용합니다. 또한 대출 신청 후 ‘추가 건강정보 요구’가 이어지는 사례도 있으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심사 보류 또는 부결로 이어집니다.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평등권, 직업 선택의 자유와 충돌하는 영역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희귀질환 환자의 자산 형성, 주택 구입, 창업 등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금융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곧 ‘경제적 배제’를 의미하며, 사회 통합의 핵심 수단에서 소외되는 구조를 고착화합니다. 대출은 단순한 금융 행위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이기에, 이러한 차별은 단순한 시장논리가 아니라 인권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희귀질환 환자의 금융권 진입장벽: 보험과 대출 이야기


국내외 제도 비교: 차별 해소를 위한 법과 정책

해외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2008년 ‘유전정보차별금지법(GINA)’을 제정해 고용 및 보험에서 유전정보를 차별 요소로 삼을 수 없도록 했으며, 일부 주에서는 금융기관도 이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프랑스, 캐나다, 호주 등도 유사한 입법을 통해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일정 기준을 충족한 희귀질환자에 대해 공적보험과 연계된 보험 상품을 제공하며, 고지의무 면제 항목을 법제화해 사회적 안전망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희귀질환 환자 전용 저리 대출 프로그램을 마련해 환자와 가족의 생활 안정을 지원하고 있으며, 독일은 보험 가입 조건에 ‘환자 권리 보호’를 명문화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민간 보험 중심의 ‘위험 회피형’ 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공적보험 보장이 미흡한 상황에서 민간 보험 접근마저 차단되면, 결국 환자는 극단적인 빈곤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국내에도 금융포용(financial inclusion)을 위한 입법, 유전정보 보호 강화를 위한 제도 정비, 환자 맞춤형 보장 상품 개발, 정부·금융기관 간 협의체 구성 등이 시급합니다.


결론은 병이 있어도 금융을 누릴 권리

희귀질환 환자는 질병이라는 생물학적 장애를 넘어서, 금융이라는 사회적 장애에도 맞서야 하는 이중의 소외를 겪고 있습니다. 보험이 거절되고, 대출이 막히며,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억울한 차별을 감내하는 현실은 개인의 삶을 통째로 가로막는 구조적 문제입니다. 지금까지의 금융 시스템은 ‘정상인’ 기준에 맞춰 설계되어 왔고, 거기에 맞지 않는 존재는 배제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논리가 암묵적으로 작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건강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회적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희귀질환 환자가 금융서비스를 받는 것은 특별한 혜택이 아니라, 헌법이 보장한 권리의 일부입니다. 누구도 병을 이유로 재정적 고립에 놓여서는 안 됩니다. 금융기관은 수익 중심 논리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며, 정부는 환자의 권리 보호를 법과 제도 안에서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는 ‘병이 있어도 금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포용적 복지국가의 척도이자, 진정한 건강 사회의 지표가 될 것입니다. 희귀질환 환자들의 목소리가 배제되지 않도록, 모두의 연대와 실질적 정책 변화가 절실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