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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결정 기록이 사라질 때 반복이 시작된다

by zidan05 2026. 2. 15.

1. 기록되지 않은 판단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의사결정은 그 순간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누군가는 회의를 열고, 누군가는 숫자를 검토하고, 누군가는 최종 결재를 한다. 그 과정은 분명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맥락은 사라지며, 당시의 긴박함과 조건은 왜곡된다. 결국 기록되지 않은 판단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조직은 과거를 잃어버리고, 현재의 판단을 매번 ‘처음’처럼 반복하게 된다.

많은 조직은 결과만 남긴다. 승인 여부, 실행 여부, 손실 금액, 회수율 같은 수치만 남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남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결정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전제와 가정, 그리고 그 판단이 내려진 환경이다. 당시 시장 상황은 어땠는지, 내부 자금 여력은 어느 정도였는지, 다른 대안은 무엇이었는지, 반대 의견은 있었는지. 이런 요소들이 사라지면 결과는 맥락 없는 숫자로만 남는다.

기록이 없으면 사람들은 ‘기억’을 기준으로 판단을 복원한다. 하지만 기억은 객관적이지 않다. 성공은 과장되고, 실패는 축소된다. 위험을 감수했던 사실은 용기로 재해석되고, 우연한 결과는 전략으로 포장된다. 이 과정에서 조직은 자신이 실제보다 더 체계적이고 더 합리적이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문제는 그 착각이 다음 판단의 토대가 된다는 점이다.

특히 손실이 발생했을 때 기록의 부재는 더 치명적이다. 왜 그 거래를 승인했는지, 어떤 위험을 인지하고도 감수했는지, 누가 어떤 근거를 제시했는지 남아 있지 않으면 책임은 개인의 인상으로 환원된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거나 “원래 괜찮은 건이었다”는 말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학습을 만들지 못한다. 학습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구체성은 기록에서만 나온다.

결국 기록이 사라진 조직은 축적을 하지 못한다. 매번 새로 시작하는 조직, 매번 같은 실수를 처음처럼 겪는 조직이 된다. 겉으로는 성장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부에는 축적된 지식이 없다. 그리고 축적이 없는 조직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 늘어날 뿐이다.


2. 책임이 흐려질 때 판단은 재현된다

 

의사결정 기록이 사라지면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바로 책임의 구조가 흐려진다는 점이다. 기록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책임의 경로를 남기는 장치다. 누가 제안했고, 누가 검토했고, 누가 승인했는지 명확히 남아야 판단의 구조가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경로가 남지 않으면 의사결정은 집단적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다.

책임이 명확하지 않으면 동일한 유형의 판단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누구도 명확히 “이 판단은 실패였다”라고 정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패는 외부 환경 탓이 되고, 예외적 사건이 되고, 운이 나빴던 사례가 된다. 그 결과 조직은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판단도 바뀌지 않는다.

또한 기록이 없으면 내부 토론의 수준도 낮아진다. 과거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꺼내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지”라는 말은 나와도, 그때 어떤 조건에서 어떤 논리로 결정했고, 그 결과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정밀하게 분석할 수 없다. 결국 토론은 감각과 인상에 의존하게 된다. 감각 중심의 토론은 강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에게 유리하다.

이렇게 되면 판단은 점점 사람 중심으로 귀속된다. 구조와 기준이 아니라, 특정 인물의 경험과 직관이 조직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그 인물이 자리를 떠나면 판단의 기준도 함께 사라진다. 후임자는 같은 실수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전달된 것은 원칙이 아니라 결과였기 때문이다.

책임이 흐려진 조직은 위험을 통제하지 못한다. 책임은 통제의 전제 조건이다. 누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알아야 통제 장치를 설계할 수 있다. 기록이 없다면 통제는 사후적 비난으로 변질되고, 비난은 방어를 낳는다. 방어가 강화될수록 솔직한 분석은 줄어들고, 기록은 더 형식적으로 변한다. 이 악순환 속에서 반복은 구조가 된다.


3. 맥락이 삭제될 때 왜곡이 시작된다

 

의사결정은 항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 동일한 숫자라도 자금 여력이 충분한 상황과 유동성이 압박받는 상황에서는 의미가 다르다. 동일한 담보라도 시장이 상승 국면인지 하락 국면인지에 따라 위험의 크기가 달라진다. 그런데 기록이 남지 않으면 이런 맥락이 사라진다.

맥락이 삭제되면 과거의 판단은 단순화된다. “그때도 이런 조건이었는데 문제 없었다”라는 식의 비교가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건이 다르고, 전제가 다르고, 내부 상황이 다르다. 맥락을 제거한 비교는 왜곡을 만든다. 왜곡된 비교는 잘못된 확신을 강화한다.

특히 성공 사례는 위험하다. 성공은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의사결정 과정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성공이 우연인지 구조적 판단의 결과인지 구분하려면 당시의 가정과 리스크 인식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기록이 없다면 성공은 전략이 되고, 전략은 반복된다. 반복되는 순간 우연은 구조적 실패로 전환될 수 있다.

맥락이 사라지면 경고 신호도 무력화된다. 과거에 어떤 지표가 위험의 전조였는지, 어떤 패턴이 연체로 이어졌는지 남아 있지 않으면 현재의 작은 이상 징후를 해석할 기준이 없다. 조직은 매번 “이번은 다를 것이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 말이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가 과거를 학습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결국 맥락 없는 판단은 단편적 데이터에 의존하게 된다. 숫자는 남지만 이야기와 과정은 사라진다. 그러나 리스크는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숫자를 만들어낸 전제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맥락을 기록하지 않는 조직은 숫자에 집착하면서도 숫자를 해석하지 못하는 역설에 빠진다. 그리고 그 역설 속에서 같은 오류는 형태만 바꾼 채 반복된다.


4. 기록 문화의 부재가 만드는 조직의 기억 상실

 

의사결정 기록은 개인의 습관이 아니라 조직 문화의 산물이다. 어떤 조직은 모든 회의에 요약이 남고, 반대 의견까지 정리된다. 반면 어떤 조직은 결과만 공유되고 과정은 구두로 흘러간다. 문화의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를 만든다.

기록 문화가 없는 조직에서는 문서가 형식이 된다. 감사나 외부 점검을 대비한 최소한의 기록만 남고, 실제 판단의 고민과 갈등은 사라진다. 사람들은 솔직한 의견을 남기기를 주저한다. 기록이 책임 추궁의 도구로 사용될 것이라는 불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기록은 방어적으로 작성되고, 실질적 정보는 빠진다.

조직의 기억 상실은 서서히 진행된다. 인력이 교체되고, 부서가 재편되고, 시간이 흐르면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은 줄어든다. 기록이 없다면 과거의 실패는 개인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함께 사라진다. 남는 것은 단편적인 결과와 왜곡된 전설뿐이다. “예전에 크게 손실을 본 적이 있다”는 말은 남지만, 왜 그 손실이 발생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 조직은 새로운 시도를 한다. 과거와 유사한 구조의 거래, 유사한 상대, 유사한 위험을 다시 감수한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비슷한 문제가 반복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놀란다. 그러나 놀라움은 학습이 아니라 망각의 반복일 뿐이다.

기록 문화는 단순히 문서를 많이 남기는 것이 아니다. 의사결정의 논리를 남기고, 반대 의견을 존중하며, 실패를 숨기지 않는 태도다. 이런 문화가 없다면 기록은 존재해도 의미가 없다. 조직은 서류를 보관하면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문다. 기억하지 못하는 조직은 성장하지 못한다.


5. 반복을 끊기 위한 구조적 전환

 

의사결정 기록이 사라질 때 반복이 시작된다면, 반복을 끊는 방법은 기록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문서 양을 늘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이다. 결과가 아니라 가정, 전제가 아니라 검증 과정, 찬성이 아니라 반대 논리까지 남겨야 한다.

또한 기록은 접근 가능해야 한다. 과거 사례를 쉽게 검색하고 비교할 수 있어야 현재의 판단에 활용된다. 기록이 저장만 되고 활용되지 않으면 다시 형식으로 전락한다. 의사결정 전에 과거 유사 사례를 검토하는 절차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기록은 살아 있는 자산이 된다.

실패 기록은 특히 중요하다. 많은 조직이 성공 사례는 공유하지만 실패는 축소한다. 그러나 반복을 막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분석이다. 어떤 경고 신호를 무시했는지, 어떤 가정을 과신했는지, 어떤 내부 통제가 작동하지 않았는지 구체적으로 남겨야 한다. 이 과정은 불편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 반복은 멈추지 않는다.

더 나아가 기록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에 귀속되어야 한다. 특정 담당자가 바뀌어도, 경영진이 교체되어도, 조직의 판단 논리는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경험이 축적된다. 경험이 축적된 조직만이 리스크를 정교하게 다룰 수 있다.

결국 의사결정 기록은 과거를 보존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미래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기록이 사라진 조직은 매번 같은 출발선에 선다. 그러나 기록이 살아 있는 조직은 같은 출발선에 서지 않는다. 과거의 실패 위에 서서 더 높은 위치에서 판단한다. 반복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의 결과다. 그리고 그 구조를 바꾸는 첫 단계는, 사라진 기록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