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리적 화법이 신뢰로 오인되는 최초의 순간
채무자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를 ‘위험한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았고, 말을 아끼지도 않았다. 질문을 던지면 즉각적인 답이 돌아왔고, 그 답변은 구조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상황 설명에는 원인과 결과가 분명히 연결되어 있었고, 숫자와 일정이 빠지지 않았다. 실무자 입장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은 상대하기가 편하다. 대화가 통하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없으며, 합리적인 협상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논리적인 말투를 ‘이성적인 태도’로 받아들였다. 이성적이라는 것은 통제 가능하다는 의미로 인식되기 쉽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의 상황을 과장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그리고 그 인상은 곧 신뢰로 전환되었다. “이 사람은 적어도 상황을 숨기지는 않겠구나”라는 판단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판단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숨어 있었다. 논리적인 말은 반드시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가장 정교하게 가공된 언어일 가능성이 높다. 말의 구조가 완벽할수록, 그 말은 이미 여러 번 다듬어진 결과물일 수 있다. 나는 이 단순한 사실을 간과했다. 말이 논리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말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실무에서는 첫인상이 중요하다. 하지만 첫인상이 정확할 확률은 생각보다 낮다. 특히 금융, 채권, 대부와 같이 이해관계가 첨예한 영역에서는 더 그렇다. 나는 그 첫인상에서 이미 방어선을 낮췄고, 그 순간부터 판단은 점점 상대의 말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이 글은 그 첫 번째 실수에서 출발한다.
2. 설명이 완벽할수록 질문이 사라지는 구조
이 채무자의 가장 큰 특징은 ‘설명이 많다’라는 점이었다. 단순히 말을 많이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설명의 밀도가 높았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단편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항상 맥락을 붙였고, 외부 변수와 시장 상황, 타인의 책임까지 구조적으로 엮어 설명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 설명이 너무 완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설명이 완벽할수록, 실무자는 더 이상 질문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미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받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설명을 듣는 동안, 검증해야 할 포인트를 하나씩 놓치고 있었다. “그건 확인해 봤나?”, “자료로 남아 있나?”, “실행된 결과는 어디까지인가?” 같은 질문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설명이 많아질수록 책임은 분산된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개인의 무능이나 판단 착오로 설명하지 않았다. 항상 구조적 문제, 외부 환경, 타인의 결정이 개입된 결과로 설명했다. 그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고, 동시에 나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책임이 분산될수록, 상대의 의도보다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사고가 이동한다.
나는 그를 검증하기보다 이해하려 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크다. 실무에서 이해는 위험하고, 검증만이 안전하다. 그러나 말이 논리적인 상대 앞에서는 이 원칙이 쉽게 무너진다. 설명을 듣는 데 집중하는 순간, 실무자는 이미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다. 나는 그 구조 안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가 버렸다.

3. 논리는 상환이 아니라 시간을 만든다
연체가 시작된 이후에도, 채무자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차분해졌고, 더 논리적으로 되었다. 그는 연체의 원인을 설명했고, 단기적 해결이 왜 비합리적인지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지금 무리하게 상환하면 전체 구조가 무너진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라는 식의 논리가 반복되었다.
그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그 논리가 항상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는 선택’을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법적 조치, 강경 대응, 집행 절차는 언제나 비효율적인 선택처럼 묘사되었다. 나는 그 설명에 설득되었고, 그 설득은 곧 시간의 손실로 이어졌다.
시간은 채무자에게 유리하다. 이 말은 교과서적인 문장이지만, 실제로 겪어보면 그 무게가 다르다. 시간은 자산을 정리할 기회를 주고, 대비할 시간을 주며, 다른 채권자와의 관계를 조정할 여유를 준다. 반대로 채권자에게 시간은 회수 가능성을 갉아먹는 요소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논리적인 말 앞에서 행동을 미뤘다.
돌이켜보면, 그 논리는 상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장치였다. 그는 시간을 얻기 위해 논리를 사용했고, 나는 그 논리를 합리성으로 오인했다. 이 지점에서 이미 주도권은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실무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상대가 공격할 때가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다. 나는 그 시간을 너무 많이 내주었다.
4. 법정에서 논리는 기록이 되지 않으면 무력하다
결국 사안은 법적 절차로 넘어갔다. 그제야 나는 안도했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법이 판단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들었던 논리적인 설명들이 법정에서도 일정 부분 반영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법정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법정에서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증거였다. 그동안의 대화, 설명, 약속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거나, 구조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반면 채무자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는 제출했고, 불리한 부분은 논리적으로 해석해 반박했다. 나는 그동안 설득당했던 말들을 하나의 사실 관계로 입증하지 못했다.
판결문은 냉정했다. 거기에는 그가 얼마나 논리적인 사람인지에 대한 평가는 없었다. 오직 문서, 기록, 실행 여부만이 판단 기준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논리적인 말은 상대를 설득하는 데에는 강력하지만, 법적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는 거의 아무 힘도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논리에 설득되어 시간을 흘려보낸 책임은 결국 나에게 돌아왔다. 법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사정도 고려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왜 그때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뿐이었다.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5. 이제 나는 말보다 기록을, 논리보다 결과를 본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실무 기준을 완전히 바꿨다. 이제 말이 논리적인 사람은 오히려 가장 먼저 의심한다. 설명이 깔끔할수록, 더 많은 자료를 요구한다. 말보다 문서를 먼저 보고, 논리보다 실행 기록을 먼저 확인한다. 약속의 정합성보다 이행의 반복성을 본다.
논리적인 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무에서 중요한 것은 말의 완성도가 아니라 결과의 누적이다. 상환이 한 번이라도 지연되면, 그 이유가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구조를 다시 본다. 설명은 참고 자료일 뿐,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단순한 원칙을 너무 늦게 배웠다.
말이 너무 논리적인 채무자를 경계하지 못한 이유는 결국 나의 심리 때문이었다. 그 말이 나의 불안을 잠재워 주었고, 불안을 없애주는 말은 항상 매력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실무에서 불안을 없애주는 말은 대부분 위험 신호다. 이 글은 그 위험을 직접 겪고 살아남은 사람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나는 이제 말이 아니라 구조를 보고, 설명이 아니라 흔적을 본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있다면, 적어도 나와 같은 함정에는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소규모 대부업·NPL 실무자의 실패 기록 아카이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문서 정리를 미뤘다가 생긴 법적 공백 (0) | 2026.02.04 |
|---|---|
| 공증을 받았는데도 회수가 안 된 사건 (0) | 2026.02.04 |
| 연대보증인을 세워도 소용없었던 이유 (0) | 2026.02.03 |
| 계약서보다 무서운 ‘구두 합의’의 흔적 (0) | 2026.02.03 |
| 차용증 한 줄이 없어서 패소한 사례 (0) | 2026.02.02 |
| 감정평가서를 맹신했을 때 생기는 문제 (0) | 2026.02.02 |
| 경매로 가면 해결될 줄 알았던 착각 (0) | 2026.02.01 |
| 선순위 하나를 간과해 발생한 손실 구조 (0) | 2026.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