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이자 환자라는 이중 역할의 시작
희귀질환을 가진 남성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 변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가족의 울타리를 책임지는 전통적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함께, 자신의 질병적 정체성을 동시에 수용해야 하는 이중 역할의 갈등이 시작된다.
많은 희귀질환 남성 환자들은 결혼과 출산 과정에서 유전적 전이 가능성, 경제적 부담, 육아 참여의 체력적 한계 등에 대해 깊은 고민을 안고 있다.
하지만 자녀가 태어나는 순간, 그는 기존의 ‘질병을 가진 환자’에서 ‘아버지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받게 되며,
이는 곧 감정적 책임감과 현실적 압박을 동반한다.
특히 “아픈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자기 의심은 일상생활과 치료 과정 전반에 스며들어
자기 효능감의 저하, 우울감, 가족 내 거리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희귀질환 아버지들의 이야기는 단지 의료 영역의 이야기가 아닌, 가족 구조와 남성 정체성에 대한 재정립의 문제로 확대되어야 한다.
치료와 생계 사이에서: 경제 활동의 모순과 현실
희귀질환을 가진 아버지에게 치료와 생계의 병행은 가장 큰 난제 중 하나이다.
질환의 특성상 정기적인 통원 치료, 입원, 재활 과정이 필요하지만, 직장이라는 공간은 질병을 고려하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희귀질환 환자는 장시간 노동, 야간 근무, 고강도 업무가 어려우며, 갑작스러운 증상 악화로 인해 불규칙한 결근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많은 기업은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제도적 보호 장치가 미흡해, 결국 환자는
생계를 위해 치료를 미루거나, 반대로 치료에 집중하다가 직장을 잃는 이중의 곤란을 겪는다.
이러한 상황은 직업 정체성의 상실, 자존감 저하, 가족 내 경제적 위축을 초래하며,
특히 아버지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과 충돌한다.
한국의 희귀질환 환자 고용지원 정책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며,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제도는 거의 없다.
따라서 질환 특성과 노동환경을 연결하는 맞춤형 고용제도, 유연근무제, 병가 보장, 재택근무 기회 확대 등이 제도화되어야
희귀질환 아버지들이 생존을 위해 건강을 희생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육아와 가정 내 역할의 재구성
희귀질환을 가진 아버지는 육아에서 물리적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못해서 안 한다”가 아니라, 신체적 한계나 만성 피로, 치료 일정 때문에
자녀와 보내는 시간, 가사 참여, 외부 활동의 기회가 현저히 제한되는 구조 속에 있다.
이로 인해 배우자에게 부담이 과도하게 집중되거나, 자녀와의 정서적 거리가 생길 수 있다.
특히 어린 자녀는 “아빠는 왜 같이 놀지 않지?”, “아빠는 맨날 누워 있어”라는 식의 질문과 오해를 갖게 되고,
이는 아버지의 정체성 상실감과 관계 단절 두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희귀질환을 가진 아버지는 ‘시간의 밀도’와 ‘관계의 질’을 통해 자녀와 깊은 유대를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예컨대, 함께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루틴화하면,
외형적 활동보다 심리적 안정과 정서 교감 중심의 육아 방식을 실현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정 내 역할 재조정에 대한 솔직한 대화와 협력이다.
배우자와의 상호 이해, 자녀에게 질병에 대한 적절한 설명, 가족 간 감정 공유가 이루어진다면
희귀질환 아버지도 충분히 가정의 중심 구성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
질병 관리와 가족관계의 균형 전략
희귀질환 환자가 된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전략은 스스로의 건강을 가정의 일원으로서 책임감 있게 관리하는 것이다.
치료를 게을리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상태를 점검하며, 자신의 몸에 대한 신호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태도가
가족에게 신뢰감과 예측 가능한 삶의 흐름을 전달하는 핵심이다.
또한 가족 간의 질병 관련 대화를 일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에게는 질병의 존재를 감추는 대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배우자에게는 자신의 상태와 감정을 솔직히 공유함으로써 정서적 협력자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정서적 회복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역 커뮤니티, 환자 단체, 심리상담 등 외부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도 있다.
이러한 연결망은 정체성 붕괴나 역할 상실로 인한 고립감을 완화해주며,
자신과 유사한 상황의 사람들과의 경험 공유를 통해 **심리적 탄력성(resilience)**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희귀질환 아버지의 삶은 불가피한 제한이 있지만, 그 안에서도 소통, 협력, 자기 관리라는 ‘세 축’을 유지한다면,
충분히 가족의 버팀목으로 살아갈 수 있다.
제도와 사회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이유
현재 한국 사회는 ‘희귀질환자=아이’ 혹은 ‘노약자’ 중심의 정책 프레임에 갇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성인 환자, 특히 ‘가장’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 중인 환자군이 존재하며,
그들에 대한 지원 체계는 사실상 전무하다.
희귀질환 아버지를 위한 제도적 지원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맞춤형 직업 재활 프로그램
-장기 병가 제도와 고용 유연성 강화
-육아와 병행 가능한 치료 일정 설계 지원
-배우자 및 자녀 심리 상담 바우처 도입
-가정 내 돌봄 부담 분산을 위한 돌봄 서비스 연계
이와 더불어 사회적 인식 또한 변화해야 한다.
희귀질환 환자를 무조건적인 도움의 수혜자나 보호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시민이자 가족의 일원으로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아버지이면서도 환자이고, 환자이면서도 사회 구성원인 삶”
이 복합적 정체성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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