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균열: 질병과 나 사이의 경계
청소년기는 인간이 자아를 확립해 나가는 결정적 시기다. 그러나 희귀질환을 가진 청소년은 이러한 시기에 질병이라는 외부의 현실과 내면의 변화가 충돌하며, 정체성의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
청소년 희귀질환자는 대개 또래와 다른 일상 루틴을 가진다. 병원 진료, 약물 복용, 제한된 운동, 면역력 관리 등은 일상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고,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로 인해 아이는 ‘나는 평범하지 않다’는 자각을 하게 되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 탐색에 혼란을 겪는다.
특히 외모에 영향을 주는 질환(예: 피부병, 근육이영양증, 신체 왜소증 등)은 또래 사이에서의 사회적 인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질병이 곧 자기 자신처럼 느껴지는 순간, 개인의 정체성과 질병이 겹쳐지는 '자아 침식'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자아 혼란은 사회적 고립, 감정 억압, 자기혐오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내면의 성장과 성찰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학교라는 전쟁터: 시선, 낙인, 그리고 숨기기
희귀질환 청소년이 일상에서 가장 치열하게 부딪히는 공간은 바로 학교다.
학교는 또래집단 속에서 정체성과 소속감을 확립하는 장소지만, 질병을 가진 학생에게는 때로 자존감이 가장 흔들리는 전장이 된다.
먼저, 많은 학생들은 자신의 질환을 숨기려 한다. 치료로 인해 머리가 빠지거나, 통원 치료로 수업을 자주 빠지는 상황, 체육활동에서의 제한 등은 친구들에게 의심과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희귀질환’이라는 말이 오히려 차별적 시선을 낳거나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아이들은 침묵을 선택한다.
또한 일부 학생은 친구들로부터 노골적인 무시나 따돌림, 비난을 당하기도 한다. 피부병이 있는 경우 “전염되지 않냐”는 말, 뼈가 약한 친구에게 “체육을 빠지려고 핑계를 대는 것 아니냐”는 말은 상처를 넘어, 자기 존재를 부정하게 만드는 말이 된다.
이처럼 학교는 희귀질환 청소년에게 자기 존재를 시험받는 공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담임교사나 단 한 명의 친구의 이해와 지지는 사회적 회복과 신뢰 회복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학교가 청소년의 치료 파트너이자 정서적 회복의 공간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질병을 넘어 나를 표현하다: 감정의 통로를 찾은 순간들
희귀질환을 가진 청소년은 또래보다 더 복잡한 감정 구조를 안고 살아간다.
통증, 피로, 두려움, 외로움, 죄책감, 부모에 대한 미안함 같은 감정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교차하며,
이 감정들을 표현하지 못하고 억누를수록 내면의 고립은 심화된다.
이런 청소년들에게 예술, 글쓰기, 사진, 음악, 연극 등은 감정을 외부로 안전하게 투사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일부 희귀질환 청소년은 자신의 치료 일지를 그림 일기로 표현하거나, 시를 통해 통증의 감각을 말로 바꾸며, 자기 치유의 출구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또한 유사한 경험을 가진 또래들과의 만남, 즉 희귀질환 청소년 캠프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의 교류는
“나만 아픈 게 아니구나”, “내가 하는 고민을 누군가도 하고 있구나”라는 공감의 힘을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표현하며, 예술적 활동으로 재구성하는 경험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치료의 연장선으로 작용하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되찾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청소년기의 사랑과 인간관계, 질병은 어디까지 관여하는가
사춘기와 청소년기는 인간관계의 지평이 넓어지는 시기이며, 이 시기의 경험은 자기 가치감과 사회적 기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희귀질환을 가진 청소년에게 연애, 우정, 인간관계는 쉽지 않은 여정이 된다.
먼저 연애에 있어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사랑할까”, “내 질병을 알면 상대가 떠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은 자기 거부와 회피로 이어진다.
이러한 자기의심은 자존감 저하, 타인에 대한 불신, 깊은 관계 형성의 어려움으로 이어지며, 고립을 자초하기도 한다.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과잉 보호나 반대의 무관심은 갈등의 원인이 된다. 부모는 자녀를 걱정하는 마음에 모든 것을 대신하려 하고, 청소년은 자율성과 독립성을 추구하는 갈등이 깊어진다.
이때 질병은 가족 안에서도 권력의 불균형과 정서적 거리감을 확대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한 경험이 있는 많은 청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질병만으로 판단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나 자신을 믿고 사랑하면, 누군가도 그렇게 대해줘요.”
즉, 질병 이전에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려는 노력과 자기 수용의 태도가 관계 회복의 시작이 된다.
도전이 만든 성장: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성숙한 나
희귀질환은 청소년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동시에 남들보다 빠른 감정 성장과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가져다준다.
많은 청소년 환자들은 자신의 질병을 단지 ‘불행한 조건’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로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성장의 길에 접어든다.
이들은 “왜 나만 아플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주체적인 관점을 갖게 된다.
질병은 극복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자 자신을 단련시키는 경험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희귀질환 청소년 중 일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간호사, 심리상담가, 사회복지사의 꿈을 꾸고,
타인을 이해하고 돕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큰 자산으로 삼는다.
또한 장애 인식 개선 활동, 캠페인 참여, TED 발표 등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사회와 공유하며,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성장한다.
결국 희귀질환을 가진 청소년이 겪는 고통은 고립과 두려움이 아닌, 자기 성찰과 깊이 있는 인간관계, 회복력이라는 선물로 변화할 수 있다.
청소년기의 도전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인생 전체에 자양분이 되는 성숙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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