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명이 없는 시간, 삶은 점점 무너진다
처음 증상이 나타난 건 대학 졸업을 앞두던 25살이었다. 손끝이 찌릿하게 저리고, 걷다가 숨이 가빠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럴 거라며 무시했다. 병원을 찾았을 때도 의사는 특별한 문제를 찾지 못했다. “스트레스나 과로, 심한 운동 때문일 수 있어요. 일단 진통제 드시고 며칠 쉬세요.” 그렇게 간단히 진단이 끝났다.
이후 7년 동안 15번이 넘는 병원을 전전했다. 혈액검사, MRI, 신경근전도 검사까지 받았지만 매번 **“이상이 없다”**는 말만 들었다. 어떤 의사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의심하며 정신과 진료를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아팠고, 점점 더 나빠졌다. 무릎이 붓고 관절이 굳었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고, 통증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회사도 자주 결근하게 됐다.
이 시기의 환자들은 치료받지 못한 질병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와 고립 속에서 살아간다. 병이 있다는 걸 스스로는 느끼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의료진은 “문제 없다”라고 말하고, 주변 사람들은 “예민하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라고 넘긴다.
진단받지 못한 환자에게 몸은 아프지만, 병은 없다는 이중 현실은 매 순간을 의심하게 만든다. 고통은 실제인데, 아무도 그 고통을 이름 붙여주지 못한다. 그 7년은 ‘아픈 몸을 가진 정체불명의 존재’로 살아야 했던 시간이었다.
희귀질환 진단 시스템의 공백
희귀질환의 진단 지연은 단지 의료진의 실수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시스템의 실패다. 한국의 1차 진료 환경은 고혈압, 당뇨, 감기 같은 흔한 질환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희귀질환처럼 낮은 유병률과 복잡한 증상을 지닌 질환은 진단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실제로 희귀질환은 대부분 다기관 손상, 비정형 증상, 시기별로 변동되는 증상 양상을 보인다. 이 때문에 내과, 신경과, 피부과, 정형외과 등 다양한 과를 오가게 되며, 질환의 전체 흐름을 조망하는 전문의가 부재하다. 게다가 환자의 진료 기록은 병원 간 공유되지 않고, 환자가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구조다.
진단 과정에서 유전자 검사나 효소검사 같은 고난도 진단이 필요한 경우에도, 1차 의료기관에서는 이를 의뢰하지 않는다. 보험 적용 문제, 검사 비용, 장비 부재 등으로 인해 “이건 큰 병원에서 보셔야 해요”라는 말만 되풀이된다. 그러는 사이 병은 악화되고, 환자는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불신과 낙심이라는 심리적 고통까지 이중으로 감내해야 한다.
의료진의 인식 변화, 희귀질환 전문 네트워크 구축, 환자 주도형 전자의무기록 시스템(EHR) 개발 등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진단을 받기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 진단이 지체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늦어진 진단, 되돌릴 수 없는 손상
진단을 받은 건 정확히 7년째 되던 해였다. 계속된 증상 악화 끝에 대형 병원 희귀질환센터를 찾았고, 거기서 **뮤코다당증(MPS)**이라는 유전대사질환 진단을 받았다. 확진을 받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드디어 병명이 생겼다”는 안도감과 “왜 이렇게 늦었는가”에 대한 분노였다.
의사는 말했다. “좀 더 일찍 진단됐더라면, 진행을 늦출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척추 관절 변형이 진행 중이고, 청력 손실도 상당합니다.”
이 말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7년간의 ‘무명 시간’이 장기 기능의 손상, 회복 불가능한 신체 변화를 남긴 것이다.
진단 지연은 단지 통증의 문제를 넘어서 삶의 기능을 빼앗는다. 사회활동의 제한, 학업 중단, 취업 기회의 상실, 심지어 가족계획의 포기까지 이어진다. 환자의 몸은 손상되고, 마음은 불신과 무력감으로 뒤덮인다. 또한 “왜 이제야 진단됐냐”는 가족의 분노, “병을 너무 키운 거 아니냐”는 주변의 무지한 시선도 상처를 더한다.
이제부터라도 환자들의 삶을 보호하려면, 진단 속도가 아니라, 진단의 방향성을 바꾸는 개혁이 필요하다.
의심의 눈으로 보는 대신, 열린 귀로 듣고, 연결된 시스템으로 조기 대응하는 의료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확진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의 전쟁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치료는 곧 시작이지만, 이미 늦어진 시간만큼의 손실을 메우는 일은 고된 여정이다.
뮤코다당증의 경우, 매주 정맥을 통한 효소 대체 치료가 필요했고, 복지 제도의 지원도 까다로운 기준을 거쳐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사회적 일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이었다. 직장을 오래 쉬었던 탓에 업무 감각이 떨어졌고, 병가가 잦다는 이유로 재계약이 거절되기도 했다. 주변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희귀병이면 무슨 병이냐”, “전염되는 건 아니냐”는 말 앞에서, 나는 다시 침묵을 선택해야 했다.
치료비 역시 부담이었다. 일부 치료는 보험이 적용되지만, 검사 비용, 교통비, 시간 소모는 고스란히 개인 몫이었다. 거기에 가족의 돌봄, 배우자의 감정노동, 자녀 양육과의 병행은 환자 개인이 아닌 가족 전체가 병과 싸우는 구조였다.
진단은 끝이 아니라, 이제 막 삶을 재설계해야 하는 새로운 시작이다. 그리고 그 재설계를 돕기 위한 정서적·사회적·경제적 다차원적 지원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
‘조기 진단’은 생존권이다
희귀질환에서 ‘조기 진단’은 단순한 의료 서비스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권리이며, 생존권의 문제다.
조기 진단은 질환의 진행을 막을 수 있고, 치료 시기를 앞당기며,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스템이 먼저 변해야 한다. 진료과 간 협진체계 강화, 희귀질환 의심 체크리스트 도입, AI 기반 진단 알고리즘 활성화,
그리고 환자 경험을 중심으로 한 진료 문화의 전환이 필요하다.
“혹시 이 증상은?”이라는 질문을 허용하는 의료, “한 번 더 들여다보자”는 시스템적 여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환자가 자신의 증상과 고통을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환경,
의료진이 희귀질환을 단순한 통계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병명을 몰랐던 7년’은 단지 과거의 상처가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수많은 진단 지연의 현장에 대한 경고다.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경청, 더 빠른 연결, 더 깊은 이해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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