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질병, 다른 세대: 유전이 남긴 가족의 패턴
경북의 한 시골 마을. 63세의 아버지와 35세 아들, 그리고 손녀까지 세 사람이 한 집에 살고 있다. 이들 모두 ‘샤르코-마리-투스병(CMT)’이라는 유전성 말초신경 질환을 앓고 있다. 손끝과 발끝의 감각이 무뎌지고, 점차 근력이 약해지는 진행성 질환이다.
아버지가 처음 증상을 느낀 건 20대 후반이었지만, “좀 무딘 편” 정도로 넘겼다. 진단을 받은 건 50대 중반이 되어서야였다.
아들 역시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주 넘어지거나, 실내화 끈을 묶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성장통이겠지”라는 부모의 말로 무시되었다. 정식 진단은 성인이 되어 증상이 급격히 진행된 후였다. 손녀 역시 유전 검사를 통해 같은 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 가족은 **3대에 걸쳐 같은 병을 가진 희귀한 ‘유전적 동일 질환 가족’**으로 남게 되었다.
이들의 삶은 질병과의 전쟁이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감내해야 하는 복합적 고통의 연속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간병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부축하며, 손녀의 미래를 두려워하는 감정의 순환 속에서 하루를 살아간다. 같은 병을 가진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이 현실은 단순히 ‘희귀’라는 단어로 정의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복합적이다.
일상이 곧 간병: 돌봄이 노동이 되는 시간표
이 가족의 하루는 모두 ‘시간표’에 맞춰 돌아간다. 아침 6시 30분, 아들이 먼저 일어나 아버지의 약과 혈압을 확인한다.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손녀는 아버지를 부축해 화장실에 데려간다. 그 사이 아버지는 아들의 수저를 챙기고, 약을 나눠준다.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보살핌이 아닌 생존의 방식이다.
낮에는 손녀가 학교에 가고, 아들은 재택근무를 시도하지만 손이 자꾸 마비되어 키보드를 놓치기 일쑤다.
아버지는 발가락 통증으로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다리를 펴기 위해 누웠다 일어나는 일을 반복한다.
이들은 ‘돌봄’이 아니라 ‘보조’가 필요한 상태이며, 일상이라는 이름의 간병 시스템 속에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일상화된 간병은 신체 기능의 저하뿐 아니라, 일과 감정, 인간관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방문 판매원이나 이웃의 안부 전화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응대할 에너지조차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가족에게 있어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약 복용 간격과 휴식 가능 시간을 빼면 고작 10시간 남짓한 활동 가능한 시간에 불과하다.
생계의 중단, 돌봄의 연속: 다세대 희귀질환 가정의 경제 구조
간병은 비용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간병을 받는 이와 하는 이가 동일 가족일 경우, 그 돌봄은 ‘무급 노동’으로 은폐된다.
아들은 대학 졸업 후 5년간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치료와 아버지의 간병으로 인해 정규직 전환 기회를 포기했다.
현재는 주 3일, 4시간씩 하는 프리랜서 영상 편집이 유일한 수입원이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정부의 희귀질환 지원제도 역시 ‘단일 환자 단위’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산정특례나 희귀질환 약제 지원은 1인 기준으로 책정되며, 가족 중 둘 이상이 희귀질환 환자일 경우 그 부담은 두 배로 늘어나지만, 지원은 늘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이 가족의 경우 월 평균 의료 관련 비용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 약값 + 물리치료비: 약 35만 원
-아들 약값 + 보조기기 교체: 약 40만 원
-손녀의 주기적 유전자 검사 및 정기 진료비: 약 15만 원
총합 약 90만 원의 고정 지출이 매달 발생하지만, 이들 중 복지 수급 대상자는 없다.
간병은 삶을 지키기 위한 일이지만, 현재의 제도는 이 간병이 가족 내에서 벌어질 경우 경제적으로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다.
결국 치료와 생계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가족은 점점 사회적 고립의 벽 안으로 밀려난다.
감정의 파편들: 번아웃과 죄책감의 교차점
돌봄을 반복하다 보면, 감정은 고갈된다.
아버지는 말한다. “이제는 아들이 눈치를 본다. 내가 더 아프면 그 아이가 더 무거워진다는 걸 아니까.”
아들은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아버지가 괜찮다고 말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요. 진짜 괜찮은 게 아니라, 말 안 하시는 거거든요.”
서로를 걱정하면서도, 서로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자각은 감정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사랑, 의무, 피로, 책임, 죄책감은 단일 감정이 아니라 동시다발로 존재하는 감정의 파편들이다.
손녀는 방과 후 치료 대신 미술학원을 다니고 싶어 하지만, 가족의 경제 상황을 알기에 “나중에 할게요”라는 말을 반복한다.
어른들은 미안함에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지만, 해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자책감에 시달린다.
이러한 감정은 자칫 우울증, 관계 단절, 심리적 무감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간병 가족의 감정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기 쉬우나, 사실은 지속적 돌봄 구조 안에서 ‘정서 노동자’로서의 소진 상태다.
다세대 간병가정을 위한 실질적 정책 제언
이처럼 한 가족 안에 두 명 이상의 환자가 있는 가정은 지금의 복지 시스템에서 수용되지 않는다.
현행 희귀질환 지원은 질병 코드, 환자 수, 산정특례 여부로만 구성되며, 가족 전체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고려가 없다.
다세대 희귀질환 가족을 위한 실질적 정책은 다음을 포함해야 한다:
-환자 간병을 가족 단위로 평가하여 소득 산정 방식 개편
-가족 전체를 하나의 지원 단위로 보고, 통합 치료·심리상담 연계 서비스 제공
-환자 간병인 겸임 가구에 대한 유급 간병 보조제도 신설
-보조기기와 치료 장비에 대한 세대별 맞춤형 렌탈 및 지원체계 확대
-심리소진을 겪는 가족 구성원을 위한 정기적 상담 및 회복 프로그램 운영
무엇보다, 다세대 환자 가족을 위한 ‘질환 중심’이 아닌 ‘삶 중심’의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제는 간병이 곧 생존이자 일상이 된 이들을 위해, 병을 넘는 구조, 정서를 돌보는 정책, 삶을 회복하는 연대가 요청된다.
'침묵의 질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명을 몰랐던 7년” — 진단 지연이 남긴 상처들 (0) | 2025.05.02 |
---|---|
희귀질환과 함께한 청소년기의 도전과 성장 이야기 (1) | 2025.05.01 |
아버지가 된 희귀질환자: 가정, 일, 치료의 균형 (2) | 2025.05.01 |
희귀질환 환아의 형제자매는 어떤 감정을 겪을까? (0) | 2025.04.30 |
장애인 등록기준에 미포함된 희귀질환: 제도 사각지대 사례 연구 (2) | 2025.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