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순위를 ‘이미 계산된 숫자’로 착각한 심사의 출발점
대출 심사 과정에서 선순위는 가장 먼저 확인하는 요소다. 등기부등본을 열고, 가장 위에 기재된 근저당권을 확인하는 순간, 실무자는 자동적으로 계산을 시작한다. 설정 금액, 채권최고액, 잔액 추정, 감정가 대비 비율. 이 모든 과정은 빠르고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나 역시 그랬다. 선순위 근저당은 분명히 존재했고, 금액도 명확했다. 그래서 나는 그 선순위를 ‘이미 반영된 숫자’로 취급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선순위를 숫자로만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위험 요소가 아니라 단순한 계산 항목이 된다. “선순위가 이 정도니까, 후순위인 내가 들어가도 아직 여유가 있다”라는 결론은 생각보다 쉽게 내려진다. 하지만 이 결론에는 치명적인 전제가 숨어 있다. 선순위가 정적인 존재라는 전제다.
실제 선순위는 절대 정적이지 않다. 선순위 채권은 언제든 실행될 수 있고, 실행되는 순간 담보 구조 전체를 다시 쓰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그 가능성을 ‘언젠가 있을 수도 있는 일’ 정도로만 인식했다. 당장의 대출 실행, 이자 수익, 계약 구조에 집중한 나머지, 선순위가 가진 잠재적 폭발력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했다.
이렇게 선순위는 심사 단계에서 이미 ‘위험 요소’가 아닌 ‘정리된 조건’으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인식 오류가 이후 모든 판단을 서서히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2. 선순위 실행 가능성을 낮게 본 판단이 만든 구조적 맹점
선순위 채권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곧바로 실행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선순위는 오랜 시간 조용히 유지된다. 이 경험적 사실이 판단을 흐린다. 나 역시 과거 사례를 떠올리며 “이 선순위는 당분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차주의 영업 상황, 기존 상환 이력, 선순위 채권자의 성향까지 고려했을 때, 급박하게 실행할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판단은 어디까지나 현재 시점의 스냅샷에 불과했다. 선순위 채권자는 나와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준은 오직 자신들의 회수 가능성이다. 차주의 상황이 조금만 흔들려도, 시장 환경이 변해도, 내부 정책이 바뀌어도 선순위의 판단은 즉각 바뀔 수 있다.
나는 이 변수를 구조적으로 설계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낮다”라는 주관적 판단이 “사실상 발생하지 않는다”라는 착각으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선순위 실행을 전제로 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설계하지 않았다. 담보가치가 하락했을 때, 선순위가 먼저 움직였을 때, 그 이후의 회수 구조를 구체적으로 그려보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 선순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요소’로 머물렀다. 그리고 이 방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선순위는 점점 위험 요소가 아닌 배경 요소가 되어갔다.

3. 연체 발생 이후에도 선순위를 중심에 두지 못한 대응 실패
연체가 발생했을 때, 나는 차주와의 소통에 집중했다. 상환 계획, 자금 회전, 단기적인 해결 가능성. 이 모든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에서도 선순위를 중심에 두지 않았다. 연체를 ‘차주의 문제’로만 인식했고, 구조 전체의 문제로 재정의하지 못했다.
연체 초기에는 여전히 “선순위는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 사실 자체가,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만들어냈다. 나는 후순위 채권자로서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시점에, 오히려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시간은 차주에게도, 선순위에게도 유리하게 흘렀다. 나에게만 불리하게.
연체가 장기화되면서 상황은 점점 선순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선순위 채권자는 차주의 자산 상태를 재점검했고, 내부적으로 실행 여부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 흐름을 구조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여전히 나의 기준은 ‘차주가 갚느냐 못 갚느냐’였고, ‘선순위가 언제 움직이느냐’는 뒷전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손실 구조는 상당 부분 완성되어 있었다. 다만 아직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4. 선순위 실행과 함께 드러난 회수 구조의 잔혹한 현실
선순위 채권자가 실행에 들어간 순간, 모든 계산은 무효가 되었다. 감정가, 시세, 호가를 기준으로 한 나의 기대 회수 금액은 의미를 잃었다. 담보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담보는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선순위가 먼저 회수하는 구조에서, 나는 후순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극단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가장 충격적인 점은 손실이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선순위가 움직이자마자 모든 이해관계는 그들을 중심으로 정렬되었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 단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응은 제한적이었다. 추가 비용을 감수하든지, 손실을 인정하든지,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초기 심사 단계에서의 판단 오류는 되돌릴 수 없었다. 선순위 하나를 간과한 대가는, 이 시점에서 명확한 숫자로 드러났다.
5. 선순위는 ‘확인 사항’이 아니라 ‘설계 기준’이라는 교훈
이 경험 이후, 나는 선순위를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다. 선순위는 더 이상 단순히 확인하고 넘어가는 항목이 아니다. 대출 구조 전체를 설계하는 출발점이다. 선순위가 존재한다면, 그 선순위가 내일 바로 실행된다는 가정을 전제로 모든 시나리오를 다시 작성해야 한다.
담보 여유율, 회수 기간, 연체 대응 속도, 관리 강도 모두 선순위를 기준으로 재조정해야 한다. 선순위가 하나라도 있다면, 후순위는 항상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인지 먼저 검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거래는 애초에 성립되어서는 안 된다.
선순위 하나를 간과해 발생한 손실 구조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사고 방식의 문제였다. 숫자를 구조로 착각했고, 가능성을 확률로 오해했으며, 시간을 내 편이라고 믿었다. 이 세 가지 착각이 겹쳐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이 손실이었다.
이 글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는 단 하나다. 같은 판단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선순위는 언제나 조용히 기다린다. 그리고 가장 불리한 순간에 움직인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손실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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