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숫자로 포장된 ‘객관성’이 판단을 멈추게 하는 순간
대출 심사나 채권 매입 과정에서 감정평가서는 유난히 강력한 힘을 가진 문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감정평가서는 숫자로 말하고, 그 숫자는 전문가의 이름과 직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실무자는 본능적으로 이 문서를 ‘객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나 역시 그랬다. 감정평가서에 기재된 금액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많은 고민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감정가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한 문장이 모든 판단을 대신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정평가서는 검토해야 할 수많은 변수를 하나의 숫자로 압축해 준다. 입지, 면적, 용도, 시세, 거래 사례. 이 복잡한 요소들이 모두 정리되어 있다는 안도감은, 오히려 사고를 멈추게 만든다. 감정가가 높을수록, 그 숫자는 더욱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문제는 이 신뢰가 검증 없는 신뢰라는 점이다. 감정평가서는 어디까지나 특정 시점, 특정 목적을 기준으로 산출된 값이다. 하지만 실무자는 이 전제를 쉽게 잊는다. 감정평가서를 보는 순간, “이 정도면 안전하다”는 결론을 먼저 내려버리고, 그 이후의 검토는 형식적인 절차로 전락한다. 이때부터 판단은 이미 왜곡되기 시작한다.
2. 감정평가 목적과 회수 목적을 동일시한 구조적 오류
감정평가서는 만능 문서가 아니다. 감정평가는 항상 목적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담보 설정을 위한 평가인지, 재무제표 반영을 위한 평가인지, 경매를 염두에 둔 평가인지에 따라 기준은 달라진다. 하지만 실무에서는 이 목적의 차이가 자주 무시된다.
나는 감정평가서를 보며 자연스럽게 ‘회수 가능 금액’을 떠올렸다. 감정가가 곧 내가 회수할 수 있는 금액의 기준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착각이다. 감정평가서는 ‘이론적 가치’를 말할 뿐, ‘실현 가능한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특히 경매나 급매 상황에서는 감정가와 실제 회수 금액 사이에 큰 간극이 발생한다.
더 큰 문제는 감정평가서가 시간에 대해 침묵한다는 점이다. 감정가는 평가 시점의 시장 상황을 반영한다. 하지만 회수는 미래의 일이다. 그 사이 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담보 상태가 어떻게 달라질지, 점유 관계가 어떻게 꼬일지는 감정평가서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는 이 공백을 스스로 메우지 않았다. 감정가 하나로 미래까지 예측하려는 오류를 범했다.
3. 감정가가 높을수록 커지는 ‘관리 방심’
감정가가 높으면 마음이 느슨해진다. 이는 의식적인 판단이 아니라, 거의 자동 반응에 가깝다. “담보 여유가 충분하다”는 생각은 관리 강도를 낮춘다. 연체가 발생해도, 즉각적인 대응보다는 상황을 지켜보는 선택을 하게 만든다. 나 역시 감정가를 근거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연체 초기, 나는 차주의 말에 비교적 관대했다. 감정평가서에 기재된 금액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정도 가치면 아직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은 대응 시점을 늦췄다. 하지만 이 시간 동안 담보의 실제 가치는 조금씩 훼손되고 있었다. 관리가 되지 않은 건물, 악화되는 점유 관계, 변하는 주변 환경. 감정가는 그대로였지만, 현실은 달라지고 있었다.
이 단계에서 감정평가서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문제를 인식해야 할 시점에, 문제를 가려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감정가라는 숫자가 방패처럼 작용하면서, 실무자의 긴장감을 무디게 만들었다. 결국 관리 방심은 구조적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4. 경매 단계에서 드러나는 감정가의 한계
경매 절차에 들어가면서 나는 처음으로 감정평가서의 한계를 체감했다. 경매를 위한 감정은 기존 평가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이전 감정가를 기준으로 기대했던 회수 금액은 현실과 크게 어긋났다. 경매 감정은 훨씬 보수적이었고, 각종 리스크가 숫자로 반영되었다.
이때 깨달은 사실은 명확했다. 감정평가서는 하나의 관점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특히 경매에서는 감정가보다 중요한 것이 ‘낙찰 가능성’이다. 아무리 감정가가 높아도, 입찰자가 없으면 그 가치는 의미가 없다. 유찰이 반복되면서 최저매각가는 계속 떨어졌고, 감정가는 점점 과거의 숫자가 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감정평가서를 기준으로 한 판단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실감했다. 감정가는 있었지만, 내가 기대했던 회수 구조는 존재하지 않았다. 숫자는 남아 있었지만, 현실은 이미 그 숫자를 떠나 있었다.
5. 감정평가서는 ‘참고 자료’일 뿐, 결론이 아니다
이 경험 이후, 나는 감정평가서를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감정평가서는 더 이상 결론이 아니다. 그저 참고 자료 중 하나다. 감정가보다 중요한 것은 회수 시점의 시장, 점유 상태, 이해관계 구조, 그리고 시간이다. 이 요소들을 함께 보지 않으면, 감정가는 오히려 판단을 흐리는 요소가 된다.
이제 나는 감정평가서를 볼 때 가장 먼저 묻는다. “이 감정가는 어떤 목적을 기준으로 산출되었는가?”, “이 가치를 실제로 실현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그 조건이 지금도 유효한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그 감정가는 숫자에 불과하다.
“감정평가서를 맹신했을 때 생기는 문제”는 단순히 평가의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사고를 멈추게 만드는 권위에 대한 문제다. 숫자와 직인은 우리를 안심시키지만, 그 안심이 가장 위험한 순간을 만든다.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하나다. 감정평가서는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판단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감정가를 믿는 순간이 아니라, 감정가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실무자의 진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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