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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대부업·NPL 실무자의 실패 기록 아카이브

차용증 한 줄이 없어서 패소한 사례

by zidan05 2026. 2. 2.

1. 신뢰와 관행이 문서를 밀어낸 출발점

 

이 거래의 시작은 전형적인 “문서 없이도 굴러가던 관계”였다. 상대방과는 이미 여러 차례 자금 거래가 있었고, 그동안 큰 문제는 없었다. 이자는 제때 들어왔고, 원금도 약속한 시점에 정산됐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실무자는 무의식적으로 거래를 ‘사람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다. 문서는 절차가 아니라 옵션처럼 느껴지고, 신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자금 요청은 급박했고, 상대방은 구체적인 사용처와 상환 계획을 설명했다. 나는 그 설명을 듣고 판단했다. 이전 거래에서도 문제없었고, 계좌 이체 기록은 남는다. 굳이 차용증까지 요구하면 관계가 어색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차용증은 “다음에 정리하자”라는 말과 함께 미뤄졌다.

이 선택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그때는 체감하지 못했다. 실무에서는 이런 식의 거래가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차용증을 매번 요구하는 사람이 까다로운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 ‘관행’이 문제의 씨앗이었다. 차용증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순간에는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는다. 문제는 분쟁이 생긴 이후에만 그 공백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2. 분쟁이 시작되자 바뀌는 질문의 방향

 

상환 기일이 지나고도 돈이 들어오지 않자, 처음에는 단순한 지연이라고 생각했다. 연락은 닿았고, 상대방은 곧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말은 점점 추상적으로 변했고, 결국 연락 빈도도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상황은 단순한 연체가 아니라 분쟁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소송을 준비하면서 나는 당연히 ‘돈을 빌려줬다는 사실’을 중심에 두었다. 계좌이체 내역, 당시 나눴던 메시지, 상대방의 과거 상환 이력. 이 모든 것이 모이면 충분히 입증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법률 상담을 거치고, 소장을 접수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법원은 이 사건을 “돈을 빌려줬느냐”가 아니라, “이 돈이 대여금이라는 합의가 있었느냐”로 본다는 점이었다.

즉, 돈이 오갔다는 사실은 출발점일 뿐이었다. 진짜 쟁점은 그 돈의 법적 성격이었다. 차용증이 없는 상태에서는, 상대방이 “빌린 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순간, 입증 책임은 전부 나에게 넘어온다. 이 구조를 이해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다. 실무에서는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사실들이, 법정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3. 계좌이체·문자·통화 기록이 무력해지는 순간

 

나는 최대한 많은 자료를 제출했다. 계좌이체 내역은 물론이고, 돈을 보낸 직후 주고받은 메시지, 통화 기록, 심지어 상대방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녹취까지 정리했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 정도 자료가 있으면 대여 사실이 인정될 것 같았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 기준은 훨씬 냉정했다.

법원은 이렇게 본다. 계좌이체는 수많은 법률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 투자금일 수도 있고, 공동사업 정산금일 수도 있으며, 개인적인 지원일 수도 있다. 문자나 통화에서 상환을 언급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법적 의미의 ‘변제 의무’를 인정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차용증이 없는 상태에서는, 모든 증거가 보조 자료에 불과해진다.

이 단계에서 나는 처음으로 소송의 무게를 실감했다. 상대방은 단 한 문장으로 모든 자료를 흔들 수 있었다. “그 돈은 빌린 것이 아니라 다른 관계에서 발생한 금원이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차용증이라는 핵심 증거가 없다는 사실 하나가, 모든 간접증거의 힘을 약화시켰다.


4. 판결문 한 줄이 확정짓는 결과의 잔혹함

 

판결 선고일, 결과는 패소였다. 판결문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장은 단순했다. “원고는 이 사건 금원이 대여금임을 인정할 만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였다.” 이 문장은 길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무거웠다. 법원은 거래의 부도덕성을 따지지 않았다. 누가 더 억울한지도 판단하지 않았다. 오직 증명 여부만을 기준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판결에서 가장 잔인한 부분은, 실제 사실과 법적 판단 사이의 간극이었다. 나는 실제로 돈을 빌려줬고, 상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법원은 그 ‘사실’을 판단하지 않았다. 법원은 오직 문서로 증명된 사실만을 판단했다. 차용증 한 줄이 없다는 이유로, 그 모든 현실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리되었다.

패소 이후, 나는 모든 과정을 다시 떠올렸다. 차용증을 쓰지 않은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귀찮았고, 관계가 불편해질까 걱정됐고, 이전에도 문제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소한 선택이, 결국 수년간의 소송과 회수 불능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5. 차용증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차용증을 대하는 기준을 완전히 바꿨다. 이제 차용증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금액이 크든 작든, 상대가 누구든, 반드시 작성한다. 길 필요도 없다. 복잡할 필요도 없다.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언제까지 갚기로 했다”는 사실만 명확히 적혀 있으면 충분하다. 그 한 줄이, 법정에서는 수천만 원, 수억 원의 가치를 가진다.

차용증 한 줄이 없어서 패소한 사례는 특별한 실패담이 아니다. 오히려 실무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사고 유형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이 중요성을 한 번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다는 점이다. 이 글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는 분명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금전 거래에서 신뢰는 중요하다. 하지만 신뢰만으로는 법정에서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문서는 불신의 상징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서 나를 살려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차용증 한 줄은 관계를 망치는 문서가 아니다. 내 생존을 보장하는 마지막 보험이다.